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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1. 독일 이데올로기 비판1: 청년헤겔파

 

1-1 청년헤겔파의 일면적이고 헤겔적인 (헤겔)철학비판

 

독일에서의 비판은, 특히 최근의 시도에서조차, 결코 철학이라는 영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전반적인 철학적 전제들을 검토해 본 적이 없으며, 사실상 그것의 모든 문제들은 한정된 철학체계, 헤겔의 그것에서 유래하는 것이다.…이러한 헤겔에 대한 의존이야말로, 왜 최근의 비판자들이 저마다 헤겔을 극복했다고 떠들면서도, 어느 하나 헤겔 체계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는가 하는 이유이다.

 

1-2 청년헤겔파의 종교적 철학비판의 한계

 

독일의 철학적 비판은 슈트라우스에서 슈티르너에 이르기까지 모두 ‘종교적’ 관념에 대한 비판에 국한되어 있다.…정치적, 법률적, 도덕적 인간—최종적으로 인간—을 종교적 인간이라고 선언한 점에 있을 따름이다.

종교가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고 전제되었다. 모든 지배적인 관계들은 종교적인 관계라고 차례차례 선언되었으며, 마침내는 찬양 즉, 법률에 대한 찬양, 국가에 대한 찬양 등등으로 바뀌었다.

 

1-3 청년헤겔파의 관념론적 철학의 한계: 이론적 반동성과 독일현실에 대한 인식부재

청년헤겔파들은 사실상 세계는 모두 의식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그들이 자립적인 존재로서 선언한 관념과 사상과 이념이야말로 인간들을 얽어매는 실제의 쇠사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이것들이야말로 인간사회의 참된 관계라고 생각하는 노장헤겔파와 마찬가지로), 청년헤겔파가 오로지 의식의 이러한 환상들에 대해서만 투쟁해야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청년헤겔파의 공상에 따르면, 인간들 사이의 여러 가지 관계들, 인간의 모든 활동과 충돌들, 게다가 인간의 속박과 한계까지도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그런 까닭에 청년헤겔파들은 그 논리적인 귀결로서, 너희들의 현 의식을 인간적이고 비판적인 의식 혹은 자아의식으로 바꾸어라, 그렇게 해서 너희들의 여러 한계들을 극복하여라 라는 도덕적인 요망사항을 인간들에게 짐을 지운다. 의식을 변화시키라는 이러한 요구는 결국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해석방식을 변화시키라는 즉, 다른 해석방식을 통하여 세계를 승인하라는 요구로 귀착된다.…이들 철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독일철학과 독일현실과의 관련 등을 문제시하지 않았다.

 

 

 

 

2.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1: 생산적 노동과 물질적 조건

 

2-1 생산과 생활의 물질적 조건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여러 전제들은 결코 멋대로 정한 독단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현실에 실재하는 전제들이며, 이들 전제로부터 이글어지는 추상은 단지 상상 속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이들 전제는 현실에 실재하는 여러 개인, 그 개인들의 활동, 그이고 그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의 활동에 의해 생산되는 그들 생활의 물질적 조건이다.

 

2-2 역사발전에 있어서 자연과 인간 활동(생산)의 관계

 

모든 인간의 역사의 첫 번째 전제는 두말할 것 없이, 살아있는 인간 개개인들의 존재이다. 따라서 첫째로 설정되어야 할 것은 이들 개개인들의 (물질적) 신체조직 및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타 자연에 대한 그들의 관계이다.…무릇 모든 역사서술은 이러한 자연적인 토대와, 역사진행의 과정에서 인간의 활동에 의해 이러한 토대가 변화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2-3 인간존재와 생산

 

인간은 의식, 종교, 또는 그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점에 의해 동물과 구별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그들 자신과 동물을 구별 짓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신체조직에 의해 규정되는 단계에서, 그들의 생존수단을 ‘생산하면서’부터였다.

 

2-4 인간존재를 규정하는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

 

인간이 자신의 생존수단을 생산해내는 방식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임과 동시에 재생산되어야만 할 생존수단의 자연적 성질에 의존한다.

이 생산의 방식을 단지 개개인들의 육체적 생존을 재생산해낸다는 측면에서만 고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생산의 방식이란 곧 이러한 개개인들의 일정한 활동의 방식이고, 그들의 삶을 표현하는 일정한 방식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일정한 ‘생활양식’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그들의 생산 즉, ‘무엇’을 생산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 이렇듯 사람들이 어떠한 존재인가는 그들이 수행하는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에 따라 좌우된다.

 

이 절에서는 역사발전에 있어서 인간의 생산 활동과 그를 제한하고 규정하는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경제학-철학 수고』에서도 동물과 구별되는 유적활동으로서 인간의 생산적 노동이 강조되었는데, 본 저작에서는 인간의 생산적 노동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적 시기마다 생산적 노동행위를 조건 짓는 물질적 조건이 핵심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특별한 강조가 인간의 행위를 무조건적으로 물질적 조건에 종속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문발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양자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분명하게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조건의 우위는 이후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물질주의자’ 또는 ‘인간의 창조적 행위를 무시한다’는 등의 공격을 받는 빌미를 제공한다. 물론 이러한 공격이 이론적으로 엄밀하지 못하고(사실 제대로 정독했다면 이 따위 헛소리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관념론 속에서 허우적대는 비판이기는 하지만 쉽게 넘길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특별한 강조가 이후 어떠한 효과(경제결정론 및 이데올로기 비판의 공백)를 낳게 되었는지 알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서술한다.

 

 

3.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2: 생산-교류-노동 분업과 소유형태

 

3-1 사회의 (소유)관계를 결정하는 생산력과 교류형태 및 노동 분업

 

여러 국가들 상호간의 관계들은 그들이 생산력, 노동 분업, 내적 교류 등을 얼마만큼이나 발달시키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 원리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한 국가의 다른 국가에 대한 관계만이 아니라, 한 국가 자체의 내부구조 전체 역시 그들이 도달한 생산 및 대내적․대외적 교류의 발전단계에 따라 달라진다. 한 국가의 생산력이 어느 정도로 발전해 있는가는 노동이 어느 정도로 분업화되어 있는가에 의해서 가장 잘 표시된다. 무릇 모든 새로운 생산력은 그것이 기존 생산력의 단순한 양적인 확대가 아닌 한, 보다 발전된 노동 분업을 가져온다. 한 국가의 노동 분업은 처음에는 노동농업으로부터 공업 및 상업을 분리시키고 , 이에 따라서 ‘도시와 농촌’의 분리와 그것들 서로 간의 이해대립을 가져온다. 이 노동 분업의 또 한 차례의 발전은 공업노동으로부터 상업을 분리시킨다. 동시에 이들 각 부문 내에서 진행되는 노동의 분업화를 통하여 다시 어는 한 특정한 작업과정에서 서로 협업하는 여러 개인들 간에도 각종의 노동 분업이 발달하게 된다. 이들 각 집단 상호 간의 상대적 지위는 농업, 공업, 상업에 있어서 노동이 조직되는 방식에 의해서 좌우된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국가들 상호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나타난다(물론 이는 더욱 발달한 교류가 주어져야 한다).

노동 분업 발전의 여러 단계는 여러 가지의 다른 소유형태와 대응한다. 즉, 노동 분업의 각각의 단계는 노동 재료, 노동 용구, 노동 생산물을 둘러싼 인간들 상호 간의 관계를 각각 결정한다.

 

3-2 노동 분업과 소유형태의 대응

 

노동 분업

소유형태

부족사회

초보적 ․ 자연발생적(가족 내 분업)

공동체적 소유

고대사회

노동 분업의 발달

도시-농촌의 분리와 대립

초기: 공동체적 소유 및 일부 사유화

후기: 사유재산의 집중화

봉건사회

도시-농촌의 분리와 대립 심화

농촌: 농노의 노동을 장악한 토지소유

도시: 장인의 노동을 지배한 사적소유

 

 

4.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3: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사회구조 및 국가는 항상 일정한 개인들의 생활과정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개인들이란 그들 자신 혹은 다른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나 나타나는 개인이 아니라, ‘현실에 있는 그대로의’ 즉, 활동하고 물질적으로 생산하는 개인들, 따라서 그들이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물질적인 한계, 전제, 조건 아래서 노동하는 개인이다.

 

이념, 개념, 의식의 생산은 무엇보다도 직접적으로 인간의 물질적 활동 및 물질적 교류—현실 생활의 언어—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 단계(최초의 단계)에서는 인간의 개념, 사고, 정신적 교류 등은 아직 사람들의 물질적 활동의 직접적인 발현으로서 나타난다. 한 국민의 정치, 법, 도덕, 종교, 형이상학 등의 언어에 표현된 정신적 생산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인간은 그들의 개념, 관념, 그 밖의 것들의 생산자이다. 하지만 현실의 활동하는 인간은 그 발전의 최고 형태에서조차도 그들의 생산력 발전 수준과 그에 조응하는 교류의 일정한 발전 수준에 의해 제약된다. 의식이란 의식되어진 존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실제의 생활을 영위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현실의 활동하는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인간의 현실적 생활과정이라는 토대 위에서 출발하여 그 생활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과 반사들을 설명한다. 인간의 두뇌 속에서 만들어지는 환상들 역시 항상 생활과정 즉,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하고, 물질적 조건들에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생활과정의 필연적인 승화물이다. 이리하여 도덕, 종교, 형이상학과 그밖에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것들에 대응하는 여러 가지 의식형태들은 더 이상 자립적인 모습을 가질 수가 없다.

 

이런 것들에는 아무런 역사도 없고 아무런 발전도 없다. 오히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만이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자신들의 사고와 그 생산물들을 변화시킨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II

 

1.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4: 현실적 해방을 위한 조건으로서 물질적 조건(생산력 및 교류형태)의 발전

 

현실적 해방이란 오직 현실세계 내에서 그리고 현실적 수단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즉, 증기기관 및 뮬 방적기 없이는 노예제는 폐지될 수 없으며, 농노제는 농업증산 없이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적절한 양과 질의 음식과 의복, 주택을 얻을 수 있기 전까지는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줄 필요가 없다.

‘해방’이란 정신적 행위가 아니라 역사적인 행위이며 해방은 공업, 상업, 농업, 교류 등의 발전수준이라는 역사적 조건에 의해 그리고 그것들의 각기 다른 발전단계에 조응하면서 이루어진다. 산업, 상업, 농업, 교류 등은 실체, 주체, 자기의식, 순수비판 등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종교와 신학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후에 충분한 발전을 이루었을 때에 이것은 종교, 신학, 순수비판 등등을 없애버릴 것이다.

 

2. 독일 이데올로기 비판2: 포이어바흐

 

…‘실천적’ 유물론자들 즉, ‘공산주의자들’은 현 세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즉, 기존의 사물들을 실천적으로 파악하고 실제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문제 삼는다.

 

감성적 세계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인식’은 한편으로는 감성적 세계에 대한 단순한 관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한 단순한 감각에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현실적인 역사적 인간’ 대신에 ‘인간이란 것’을 말한다. 그 ‘인간’은 실제로는 ‘독일인’들이다. 감성적 세계에 대한 관조라는 첫 번째 경우에서, 그는 그의 의식 및 감각과 모순되는 사태들과 직면하게 되며, 그가 가정했던 감성적 세계의 모든 부분들의 조화, 특히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를 헷갈리게 하는 사태에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된다.

그러자 이런 교란을 없애기 위해서 그는 두 개의 지각작용이란 것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즉 하나는, ‘단지 일상적인 분명한’ 것을 지각하는 속물적인 지각, 다른 하나는 사물의 ‘참된 본질’을 지각하는 고차원적이고 철학적인 지각이다. 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감성적 세계가 영원한 옛날로부터 직접 주어진, 영원히 항상 같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의 생산물이고 사회상황의 생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참으로 이런 의미에서 감성적 세계는 역사적인 산물이라는 사실을 즉, 이전 세대의 어깨 위에 서서 자기 세대의 산업과 상호교류를 발전시키고, 변화된 욕구에 따라 자신들의 사회체제를 바꾸어 나가는, 일련의 각 세대들의 활동의 결과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간단한 ‘감성적 확신’의 대상들조차도 오직 사회발전, 산업 및 상업교류를 통해서만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산업과 상업, 그리고 생활필수품의 생산과 교환이 분배를 결정하며, 생산․교환․분배가 이루어지는 양식에 의해 다시 서로 다른 사회계급구조가 결정된다. 그래서 이를테면 맨체스터에서 포이어바흐는 단지 공장들과 기계만을 볼 뿐, 백 년 전에 그곳에는 물레와 베틀밖에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며, 또한 로마의 평원에서 그는 단지 목초지와 습지만을 볼 뿐, 그곳에 아우구스투스 형제의 시대에는 로마 자본가들의 포도원과 별장들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한다.

 

분명히 포이어바흐는 적어도 ‘순수’유물론자는 능가하고 있는 바, 그는 인간 역시 ‘감각의 대상임’을 깨닫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을 단지 감각의 대상으로서만 이해할 뿐, 감성적 활동으로서 이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여전히 이론과 사유의 영역에서만 인간을 그 주어진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현 생활조건—곧 그들을 현재 존재하는 대로의 그들로 형성한—하에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또한 실제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인간에 도달하지 못하고, ‘인간’이라는 추상에서 멈추어 버렸으며, 다만 현실적인, 개별적인, 육체적인 인간만을 감정적으로 인식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의 생활조건을 전혀 비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결코 감성적 세계를, 그 감성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개인들의 총체적이고 살아 숨 쉬는 감성적 ‘활동’으로서 파악하는 데는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예컨대 그가 건강한 인간들이 아닌, 삶이 곪아 터지고, 과로에 지치고, 폐병에 걸리고, 굶주림에 지쳐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게 되면, 그는 ‘고차원의 지각작용’과 저 관념적인 ‘유(類)로서의 보상’ 속으로 도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듯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산업뿐만 아니라 사회구조를 변혁해야 할 필요성과 조건을 발견하는 바로 그곳에서, 곧바로 관념론으로 전락해버린다.

 

3.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5: 사회의 상태를 결정하는 생산력들의 총합

 

첫 번째 전제, 따라서 ‘역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은 우선 살아 있어야 한다는 모든 역사의 전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음식, 주거, 의복, 기타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최초의 역사적 행위는 이들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의 생산 즉, 물질적인 생활자체의 생산이었다.

두 번째 전제, 최초의 욕구의 충족은 즉 충족행위 및 충족수단은 새로운 욕구를 유도해 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욕구의 창출이야말로 최초의 역사적 행위이다.

세 번째 전제, 이것은 처음부터 역사를 갖고 있었는데, 곧 자신들의 삶을 매일매일 재생산하는 인간은 자신들의 종족을 번식시킨다는 것, 즉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부부 간—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즉 ‘가족’이다. 이 가족은 애초엔 유일한 사회관계였는데, 나중에 증대된 욕구들이 창출됨에 따라 종속적인 위치로 떨어졌다(독일은 예외). 그러므로 가족은 실제 존재하는 경험적인 사실들을 근거로 하여 취급되고 분석되어야만 하며, 독일에서 흔히 그렇듯이 ‘가족의 개념’에 근거하여 취급되고 분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로부터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특정한 생산양식 또는 산업단계는 언제나 특정한 협업양식 또는 사회발전 단계와 결합되어 있으며, 그리고 이 노동협업 양식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생산력’이라는 사실, 그리고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여러 생산력들의 총합이야말로 곧 사회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사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항상 산업 및 교환의 역사와 관련지어서 연구되고 서술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근원적인 역사관계들의 네 가지 계기, 혹은 네 가지 측면들을 고찰한 뒤라야 비로소 우리는 인간이 ‘의식’ 또한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양(羊)과 같은 의식(동물과 같은 무리의식-발제자), 도는 종족의식은 생산성의 증대, 욕구의 증대 그리고 이 양자의 근저를 이루는 인구의 증가에 의해서 더욱 발전하고 확장된다. 생산성 상승, 욕구증대, 인구증가와 함께 노동 분업이 발전한다. 분업은 최초에는 성적 차이에 의한 분업에 불과했으나, 그 다음에는 자연적 소질(예컨대 체력), 욕구, 우연 등등에 의해서 저절로 또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노동 분업이었다.

노동 분업이 그야말로 분업이 된 것은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분화가 나타나는 순간부터였다. 이 순간부터 의식은 자신을 현행 실천에 대한 의식이 아닌 별개의 것으로, 즉 뭔가 현실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고서도, 현실적으로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다면서 우쭐대기 시작했다. 이 순산부터 의식은 자기 자신을 현실세계로부터 해방된 위치에 올려놓았으며, ‘순수’이론, 신학, 철학, 도덕 등등을 계속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론, 신학, 철학, 도덕 등등이 현존하는 실제관계들과 모순에 처하게 되는 사태조차도, 오로지 당대의 사회관계들이 당대의 생산력과 무순될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런 사태는 특정한 국민적 관계 영역 내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정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즉 모순이 그 국민의 테두리 내에서가 아니라 그 국민의 의식과 타 국민의 실천 사이에서 야기될 때, 즉, 한 국가의 국민적 의식과 일반적 의식 사이에 야기될 때도 일어날 수 있다(독일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듯이).

더 나아가서 의식이 저 혼자서 뭔가를 한다면 그것은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이 전체 쓰레기더미로부터 단 하나의 결론을 얻을 뿐이다. 즉, 생산력, 사회상태, 의식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 계기는 서로 모순에 처할 수 있고, 또 처하지 않을 수 없는 바, 왜냐하면 ‘노동 분업’의 출현과 함께 정신적 활동과 육체적 활동, 향락과 노동, 생산과 소비가 각기 다른 개인들에게 맡겨질 가능성, 아니 현실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라는 결론,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모순에 처하지 않을 유일한 가능성이란 오직 노동 분업이 폐지될 때뿐이라고 하는 결론 등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유령’, ‘인연’, ‘고차원적 존재’, ‘개념’, ‘양심’ 등은 잔지 관념적이고 사변적이며 정신적인 표현, 즉 고립된 개인들이나 가지고 있는 관념들일 따름이며, 또한 질곡과 제한 즉, 생활을 재생산해내는 생산양식과 그 결합된 교류형태가 그 안에서 운동하고 있는 지극히 경험적인 질곡 및 제한을 표현해 주고 있는 여러 가지 관념들에 지나지 않는다.

 

4.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6: 사회적 분업의 결과로서 사유재산제와 국가

 

이들 온갖 모순들을 내포하고 있고, 가족 내에서의 자연적 분업과 서로 대립하는 개별 가족들로의 사회의 분화를 자기의 토대로 삼고 있는 노동 분업은 동시에 노동과 노동생산물의 ‘분배’, 즉,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불평등한 분배도 자기내부에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소유, 처와 자식이 남편의 노예인 가족에게서 이미 그 최초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소유’ 역시 내포하고 있다.

결국 노동 분업과 사유재산제는 동일한 것(소유(형태)-발제자)에 대한 다른 표현방식일 뿐이다. 즉 똑같은 것이 한편에서는 그 ‘활동’에 관하여, 다른 한편에서는 그 ‘활동의 산물’에 관하여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노동 분업은 각 개인 또는 한 가족의 이익과 서로 교류하고 있는 모든 개인들이 갖는 공동이익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 공동이익이라는 것은 결코 단순히 관념상으로 존재하는 ‘일반이익’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선 현실 속에서 서로 노동 분업을 행하고 있는 여러 개개인들 간의 상호의존관계로 존재하고 있다.

바로 이 특수이익과 공동이익 간의 모순으로부터 공동이익은 ‘국가’라고 하는 독자적인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국가란 현실의 개인이익과 집단이익으로부터 멀리 동떨어진 환상적 공동체이다. 하지만 이 환상적인 공동체는 항상 온갖 가족집단 및 종족집단—혈연, 언어, 비교적 큰 규모의 노동 분업 및 기타 이해관계—속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현실적인 결함을, 특히 우리가 뒤에서 보게 될 계급을 자신의 존립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때 계급은 이미 노동 분업 속에서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모든 인간집단을 분열시키며, 그 중 하나의 집단이 다른 모두를 지배한다.

이로부터 자음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국가 내부에서의 온갖 투쟁들 즉, 귀족제, 군주제, 민주주의 사이의 투쟁, 참정권을 쟁취하려는 투쟁 등등은 단지 환상적인 형태들—일반이익이란 공동이익의 환상적 형태에 불과하다—에 지나지 않으며, 그 환상적 형태 속에서 실제 진행되고 있는 것은 각기 다른 계급들 간의 현실적 투쟁들이다(이 점에 관하여 독일의 이데올로그들은 아주 어렴풋하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독불연보>와《신성가족》에서 이 주제에 관해 충분한 초보교육을 실시해 주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나아가서는, 무릇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하는 그 모든 계급은—비록 그 계급의 지배가 마치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에서와 같이 모든 낡은 사회형태와 지배, 그 자체를 폐지해 버리는 데에까지 나아가는 경우에 있어서조차—자기계급의 이익이야말로 보편적 일반이익이라고 선언할 수 있기 위해서는—일반이익이란 애당초 강요되는 것이다—무엇보다도 먼저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한편, 실제로 공동이익과 환상적인 공동이익을 끊임없이 거스르고 있는 이들 특수이익들 간의 실천적인 투쟁 역시, 국가라는 형태 속에 내재된 환상적인 ‘일반이익’에 의한 실제적인 중재와 제한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동 분업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보여준다. 즉, 인간이 자연적으로 진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한, 즉 특수이익과 공동이익 간의 분열이 존재하는 한, 그래서 활동이 자유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행해지고, 또 활동이 분화되어있는 한, 인간 자신의 활동은 그 인간에 대해 적대적인 하나의 소외된 힘으로 되게 마련이며, 인간은 이 힘을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힘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이다. 노동 분업이 출현하자마자 모든 개인들은 특정한 배타적인 활동영역을 갖게 된다. 이 활동은 그에게 강요되는 것이며 그는 이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이에 비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수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사회가 생산전반을 통제하게 되므로 각 개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일을, 내일은 저 일을,…가능하게 된다.

 

5. 공산주의 운동의 조건

 

이와 같은 ‘소외’—저 철학자들이 이해하기 쉬우리라 생각되는 용어를 사용한다면—는, 두 개의 실제적 전제 조건이 주어질 때만이 지양될 수 있다. 즉 그것이 하나의 ‘견딜 수 없는’ 힘으로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항하여 인간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될 그런 힘으로 되기 위해서는, 첫째, 그것은 반드시 광범한 대중을 ‘무산자’ 상태에 처하게 함과 동시에 둘째, 그들로 하여금 현존하는 부(富) 그리고 문명세계와 모순에 처하게 되는 상태로 빠지게 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전제조건은 모두 생산력의 고도의 발전수준을 다시 그 전제로 한다. 한편 이 생산력들의 발전(이는 동시에 인간이 지역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세계사 속에서 현실적으로 경험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실적 전제이다. 즉, 첫째로 생산력의 발전 없이는 단지 궁핍만이 일반화될 뿐이고, 따라서 궁핍과 함께 필수품을 둘러싼 투쟁이 다시 시작되지 않을 수 없어, 온갖 해묵은 더러운 일들이 다시 발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둘째로는 생산력의 세계적 발전과 함께 비로소 인간의 보편적 교류가 확립되고, 따라서 한편으로는 ‘무산자’ 대중이라는 현상을 모든 국가 속에서 만들어 내고(보편적 경쟁), 다른 한편으로는 각 국가는 다른 국가의 혁명적 변화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결국에는 지역적으로 국한된 개개인들을 세계사적이며 동시에 경험적으로도 보편적인 개인들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위의 것들 없이는 (1) 공산주의는 단지 하나의 지역적인 현상으로만 존재하며, (2) 교류의 힘 역시 보편적인 것으로, 즉 견딜 수 없는 힘으로까지 발전할 수 없으며, 미신에 둘러싸인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3) 교류의 확장은 지역적 공산주의를 없애버릴 것이다. 경험적인 면에서 예상할 때, 공산주의는 오직 ‘일거의’ 또한 ‘동시적인’ 행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이는 다시 생산력과 그와 연결된 세계적 교통의 보편적 발전을 전제로 한다.

한갓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 대중—자본을 갖지 못하고 최소한의 욕구조차 만족시킬 수 없는, 또한 경쟁에 의해 야기된 철저하게 불안정한 위치에서, 안정된 생활의 원천인 저 노동활동을 이제 항상적으로 잃어버리는 그와 같은 대량의 노동력—역시 세계시장을 전제로 한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가 오로지 세계사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은 그들의 행위인 공산주의가 오로지 ‘세계사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각 개인들이 세계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곧 그 개인들이 직접적으로 세계사에 결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공산주의란 우리에게 있어 달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며, 혹은 현실이 따라가야 할 하나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현재의 상태를 폐기(지양-발제자)해 나가는 ‘현실의 운동’이라 부른다. 이 운동의 여러 조건들 역시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들로부터 생겨난다.

 

6. 교류형태로서의 시민사회

 

지금가지 모든 역사단계에서 존재했던 생산력에 의하여 결정되고 역으로 그 생산력을 결정하는 교류형태가 바로 시민사회이다. 시민사회는 앞서 우리가 언급했던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단일 가족 및 복합가족(이른바 종족)을 그 전제 및 토대로 삼고 있으며, 시민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정의 역시 앞의 서술에서 명백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민사회야말로 모든 역사의 진정한 초점이자 참된 무대라는 것, 그리고 군주나 국가의 행위에만 주목하고 이 실제의 여러 관계들을 무시하는 종래의 역사관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게 된다.

 

7.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공산주의 혁명

 

…역사의 세계사로의 이러한 전환이란 결코 ‘자기의식’, 세계정신 혹은 다른 어떤 형이상학적인 유령의 추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야말로 물질적이고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행위이며, 오고, 가고, 먹고, 마시고, 옷 입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행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위로부터 명확해지는 것은 사람의 현실적인 정신적 부(富)는 완전히 그의 실제적인 관계들의 부(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오직 이것만이 각 사람들을 각종의 국민적 또는 지역적 한계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전 세계의 생산(정신적인 생산을 포함하여)과 실천적으로 관계를 맺게 하고, 또한 전 지구를 이렇게 모든 측면에서 전면적으로 생산해내는 즐거움을 누릴 능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준다. 전반적인 상호의존 즉, 각 사람들 간의 이 자연필연적인 ‘세계사적’ 협동형태는 저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서 이제 그 힘들 즉, 인간 상호 간의 작용에서 생겨났지만 지금까지 완전히 소외된 힘으로서 인간을 위압하고 지배해온 저 힘들에 대한 통제와 의식적 지배로 전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이 전개된 역사관으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을 얻게 된다.

(1) 생산력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단계가 도래하는 바, 그 때 생산력 및 교류수단은 기초의 관계들 밑에서는 단지 재해만을 야기할 뿐, 더 이상 생산적이지 못한 파괴적인 힘(기계체계와 화폐)으로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 일과 결부되어 하나의 계급이 전면에 부상하는데 이 계급이야말로 사회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사회의 온갖 무거운 짐들을 다 짊어지고 있으며,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다른 모든 계급들과 가장 날카롭게 대립하지 않을 수 없는 계급이다. 이 계급은 사회 전 구성원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이 계급으로부터 근본적인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의식 즉, 공산주의 의식이 발생되어 나온다. 물론 이런 의식은 이 계급의 상태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통하여 다른 계급들 속에서도 형성될 수 있다.

(2) 어느 특정한 생산력의 활용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란 곧 사회의 어느 특정한 계급의 지배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으로, 그 계급의 사회적인 힘—이것은 그 계급의 ‘소유’로부터 획득된다—은 그 각각의 국가형태 속에서 ‘실천적’-관념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모든 혁명투쟁은 그 당시까지 권력을 지녀온 계급에 대항하여 수행된다(이들은 현 생산조건의 유지를 통해서 이익을 얻는다. -마르크스의 주).

(3) 지금까지의 모든 혁명은 활동의 양식은 변화시키지 않은 채, 단지 그 활동의 새로운 분배만을 즉 다른 사람들에게 노동을 새롭게 분배하는 것만을 문제로 삼아 왔다. 이에 비해 공산주의 혁명은 지금까지 있어 온 ‘활동양식’에 반대하며, ‘(임금-역자)노동’을 없애 버리고, 온갖 계급의 지배와 더불어 그 계급들 자체를 없애 버린다. 왜냐하면 이 혁명은 더 이상 사회 속의 한 계급으로 산정되지 않으며 하나의 계급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계급, 따라서 자기 스스로 현 사회의 모든 계급, 모든 국가 등등의 폐지(발제자)를 표현하고 있는 계급에 의해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4) 이러한 공산주의 의식이 대규모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도 또한 그 목적 자체의 승리를 위해서도 광범위한 인간변혁이 필요한데, 이 변혁은 오로지 실천적인 운동 즉, ‘혁명’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혁명이 필요한 까닭은 단지 지배계급이 달리 타도될 ‘방법이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타도를 수행하는’ 계급은 오직 혁명 속에서만 모든 낡은 찌꺼기를 떨쳐 버리고 사회를 새롭게 건설할 능력을 몸에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8.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7: 혁명의 조건으로서 생산력 발전과 혁명적 대중의 형성

 

이렇듯 이 역사관의 토대는 현실의 생산과정을—생활 그 자체의 물질적 생산으로부터 출발하여—상세하게 설명하고 그리고 그 생산양식과 관련되어 그것에 의해 만들어지는 교류형태를—즉 모든 역사의 토대인 여러 단계의 시민사회를—포괄적으로 파악하고, 그리고 그 시민사회가 국가로서 활동하는 모습들을 묘사함과 함께 각종의 이론적 생산물인 의식 형태, 철학, 종교, 도덕 등을 이 시민사회를 근거로 하여 설명하고, 또한 시민사회라는 토대를 근거로 하여 그것들의 형성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비판이 아닌 혁명이야말로 종교, 철학 기타 온갖 이론 및 역사의 추진력이다. 이 역사관은, 역사란 ‘정신에 대한 정신인’ ‘자기의식’(바우어의 개념-편자)으로 환원된다고 해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역사의 각 단계에는 각 세대가 그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 성과와 생산력의 총합,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연에 대한 관계 및 개인들 상호 간의 관계, 다시 말해서 생산력, 자본제 및 환경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대에 의해 개조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새로운 세대에 대해서 그 특유의 생활조건들을 규정하고, 그 세대에게 특정한 발전, 특수한 성격을 부여한다는 것 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역사관은 인간이 환경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경은 인간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각 세대가 존재 속에서 발견하는 이러한 생활조건들이야말로 주기적으로 역사에 재현되는 혁명적 진동이, 과연 기왕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토대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것인지 아닌지 까지도 결정한다. 만약 완전한 혁명을 위한 이들 물질적 요소들이 준비되지 않는다면, 즉 한편으로 당시의 생산력,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대중의 형성—현 사회의 일면적, 부분적 상태에 반대해서만이 아니라, 현재의 ‘생활의 생산’ 자체에 반대하여, 현 사회의 토대인 ‘총체적인 활동’에 반대하여 혁명을 일으키는 혁명적 대중의 형성—, 이 양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때는 아무리 저 혁명이 이념이 수없이 외쳐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천적인 발전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되어 버린다.—공산주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9. 독일 이데올로기 비판3: 관념론적 역사관

 

종래의 모든 역사관은 역사의 이러한 실재적 토대를 완전히 무시하여 왔거나, 아니면 역사 과정에는 아무 상관도 없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는데 그쳤다. …이와 함께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 역시 역사로부터 배제되었으며, 그럼으로써 자연과 역사 간의 대립이 설정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관은 결국 역사 속에서 단지 왕들과 국가들의 장엄한 정치적 사건들, 종교적 투쟁 및 기타 이론적 투쟁들만을 발견할 뿐이며, 특히 역사의 모든 시대에 있었던 “그 당시의 환상마저 자기 것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빈 말을 실천적으로 척결시키는 일,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이들 관념을 제거하는 일은 이미 우리가 말했듯이 환경의 변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론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 대중 즉,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그런 이론적 관념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척결해야 할 아무것도 없다. 이들 대중이 일찍이 약간의 이론적 관념들, 예를 들어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래전에 이미 환경의 힘에 의해 제거되어 버렸다.

 

10. 독일 이데올로기 비판4: 포이어바흐의 한계

 

포이어바흐가 자신을 ‘보통사람’의 덕을 갖췄으므로 공산주의자다라고 선언하면서, 마치 공산주의자를 ‘인간이라는 것’의 하나의 서술어에 불과한 듯이 얘기하고, 그리하여 실제로는 특정한 혁명적 당파의 소속자를 지칭하고 있는 공산주의라는 말이 하나의 단순한 개념범주로 바뀌어 질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포이어바흐가 얼마나 잘못을 범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인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전체추론은, 기껏 인간은 서로 상대방으로 필요로 하며, 또한 언제나 필요로 해왔다고 하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 사실에 관한 의식관을 확립하고자 원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단지 현존하는 사실에 관한 올바른 의식만을 만들어 내고자 할 뿐이다. 하지만 실제 공산주의자의 관심은 기존 사물의 질서를 뒤집어엎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들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 혹은 공산주의자들은 참으로 그것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는 그들이 실천적인 방식으로, 혁명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자신들의 존재와 본질을 통일시켜 버리는 순간 증명될 것이다. 결코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인간세계를 그려내지 못하며, 항상 외적인 자연, 그것도 인간에 의해 아직 정복되지 않은 자연 속으로만 도피한다. 하지만 산업이 만들어내는 모든 새로운 발명과 진보는 이 자연의 영역을 하나하나 뜯어 먹으며 포이어바흐의 그와 같은 명제를 예증해 줄 실제 토양을 끊임없이 축소시켜 갈 것이다.

 

III

 

1.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9: 지배계급과 지배의식

 

어떠한 시대에서도 지배적 사상은 곧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즉 사회의 물질적인 힘을 지배하는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정신적인 힘도 지배한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지배하고 있는 계급이 결국 정신적 생산수단도 관리하며, 그리하여 정신적인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대체적으로 그 지배사상에 종속된다. 지배적인 사상이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들의 관념적 표현, 사상으로서 파악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 그 자체일 뿐이며 따라서 어는 한 계급을 지배계급으로 만들어주는 관계들의 표현이고 따라서 그 계급의 지배사상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앞서 지금까지의 역사에 있어서 주요한 힘들 중의 하나로 보았던 노동 분업이 이제 지배계급 애에 있어서도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의 분업으로 나타나고, 그리하여 이 계급 내의 한 부분이 그 계급의 사상가로 등장하며(그 계급의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이데올로그인 이들은 그 계급의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내면서 생계를 꾸려 나간다), 다른 부분들은 이들 사상과 환상을 보다 수동적인 태도로 수용한다. 왜냐하면 그 나머지 부분들은 실제로는 그 계급의 능동적인 성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나 사상을 만들어 낼 시간이 보다 적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역사과정을 파악함에 있어 지배계급의 사상을 지배계급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켜 독자적인 존재라고 간주한다면, 혹은 그 어떤 시대에는 이러저러한 사상이 지배했다고 말하기만 하고, 그 사상들이 만들어지게 된 조건 및 그 생산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 사상의 원천인 각 개인들과 세계의 상태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예를 들어, 귀족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는 명예, 충성 등의 개념이 지배적이었고, 부르주아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는 자유, 평등 등의 개념이 지배적이었다고만 말해도 될 것이다. 실제 지배계급은 대체로 이와 같이 생각한다.

 

혁명을 일으키는 계급은, 그들이 다른 계급에 대립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처음부터 하나의 계급으로서가 아니라, 전 사회의 대표자로서, 한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모든 사회의 대중으로서 자신을 표방한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까닭은, 애초부터 그 계급의 이익이 다른 여타 피지배계급의 공동이익과 매우 깊게 결합되어 있는데다가, 그 당시의 압박상태 하에서는 그 계급의 이익이 아직 특수한 한 계급의 이익으로까지 전개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계급의 승리는 지배적 지위에 이르지 못한 여타 계급의 많은 개개인들에게까지도 이익을 베푼다. 하지만 이런 일은 그 승리가 이들을 지배계급으로 상승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일어난다. 프랑스의 부르주아가 귀족의 지배를 타도했을 때, 그에 의하여 많은 프롤레타리아들이 프롤레타리아 이상의 지위로 상승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이 일은 그들 프롤레타리아들이 부르주아가 되는 한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다.

이렇듯 모든 새로운 계급은 오직 예전의 지배계급의 기반보다 넓은 기반 위에서만 자신의 지배를 확립할 수 있다. 그 대신 얼마 안가서 새로운 이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대립이 그만큼 더 첨예하고 심각하게 발전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이 새로운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은 모둔 종래의 지배를 추구한 계급이 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더욱 더 결정적이고 더욱 더 근본적으로 종래의 사회 상태를 부정할 것을 자신의 투쟁목표로 삼게 되리라는 것을 예측하게 해준다.

어떤 한 계급의 지배가 마치 어떤 한 사상의 지배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모든 현상은, 사회가 조직되는 형태가 더 이상 계급지배가 아니게 되는 순간, 즉, 더 이상 특수이익을 보편이익으로서, 아니면 ‘보편이익’만을 지배적인 것으로서 표방할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 저절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IV

 

1. 생산용구(방법)와 소유형태

 

지금까지 우리의 연구는 생산용구로부터 출발하여 왔으며, 이를 통해 어떤 특정한 산업단계에서는 사유재산제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이미 보여 주었다. 채취산업에서는 사유재산제가 아직 인간노동과 완전히 합치하고 있다. 소규모 산업 및 지금까지의 모든 농업에 있어서의 소유제도는 현존하는 생산용구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대공업에 있어서 생산용구와 사유재산제 간의 모순은 대규모 공업의 산물이며 대규모 공업은 이 모순을 생산해내면서 고도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오직 대규모 공업만이 사유재산제의 폐지를 가능하게 한다.

 

2. 물질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분화: 도시와 농촌 간의 분화 및 길드

 

물질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 간의 가장 중요한 분화는 도시와 농촌 간의 분화이다. 도시와 농촌 간의 이 대립은 문명과 함께, 부족제도로부터 국가로, 국지성으로부터 민족성으로 이행함과 함께 시작되어,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전 역사를 통해 일관되어 왔다.

도시의 출현이란 동시에 행정, 경찰, 조세, 등 요컨대 통치제도의 출현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또한 정치라는 것의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노동 분업 및 생산용구에 기초하여 주민의 2대 계급으로의 분화가 나타난다. 사실 도시는 이미 인구, 생산용구, 자본, 향락, 욕망의 집중체인 데 반해, 농촌은 그와 정반대의 사실 즉 고립화 및 개별화로 나타난다. 도시와 농촌 간의 이 대립은 오직 사유재산제의 틀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대립은 곧 각 개인들이 노동 분업 하에서 그들을 강제하는 하나의 특정한 활동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다. 이 예속으로 인하여 한 사람은 꽉 막힌 도시 동물로 갇혀 지내고 도시와 농촌 간의 분화는,

 

이 도시들에서의 자본은 자연친화적으로 발전한 자본이었고, 한 채의 건물과 수공업 연장들, 또한 교류의 미발달 및 유통의 미비로 인하여 자본은 현금으로 바꿔질 수 없었고, 그리하여 자손 대대로 물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돈(화폐)으로도 교환될 수 있고,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아무데나 투자할 수 있는 근대적인 자본과는 달라서, 이들 자본은 그 소유자의 특정한 노동 분야에 직접적으로 결합된 채 결코 그 노동으로부터 분리될 수가 없었으니,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자본은 하나의 ‘신분제적’ 자본이었다.

도시에 있어 각각의 길드들 사이에는 노동의 분업화가 아직도 전개되지 않고 있었으며, 또한 각 길드 내부에서도 노동 분업은 각 작업자들 사이에서조차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작업자들은 작업의 전체과정을 두루 통달해야 했으며, 그의 연장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들 줄 알아야만 했다. 각 도시들 간의 제한된 교류와 미약한 연결 관계 때문에 노동 분업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고, 따라서 장인이 되고자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기능 전체에 두루두루 숙달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중세의 수공업 숙련공들은 자신의 특수한 작업 및 그것을 익히는 일에 매우 커다란 흥미를 갖고 있었으며, 이 흥미는 제한적이나마 예술적인 의미로까지 고양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중세의 수공업 숙련공들은 자신의 작업에 완전히 몰두한 채 그 작업에 대해 즐거운 마음으로 예속되었고, 자신의 노동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근대 노동자에 비해 훨씬 깊이 그 노동 안에 포섭되어 있었다.

 

3. 새로운 노동 분업: 상업과 공업의 분리 및 매뉴팩처

 

도시들 간에도 노동 분업이 나타난 결과, 우선 출현한 것이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즉, 길드체제의 틀을 벗어난 생산방식의 발생이었다. 이탈리아 및 조금 지난 후에 플랑드르 지방에서 나타난 공장제 수공업의 최초의 융성은 외국과의 교류를 그 역사적 전제로 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들—예컨대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공장제 수공업은 애초에는 국내 시장만을 상대로 하였다. 공장제 수공업은 앞에서 말한 전제 외에도 또한 이미 진전되어 있던 인구의 집적—특히 농촌에서의—과 자본의 직접을 필요로 하였다. 자본은 개인들 손에 축적되기 시작하였고, 길드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길드 내에서, 일부는 상인들 내에서 축적되기 시작하였다.

 

길드에 속박되지 않은 공장제 수공업이 나타남과 함께 소유관계 역시 곧 변화하였다. 자연발생적, 신분적 차원을 넘어선 최초의 진전은 상인의 등장에 의해 마련되었다. 애당초 상인자본이란 이동 가능한 것인데다가, 당시의 조건 하에서 볼 때에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자본이었다. 두 번째 진전은 공장제 수공업의 등장과 함께 이룩되었으니, 공장제 수공업은 대량의 자연적 자본들을 동원하였으며, 또한 그 자연적 자본의 양에 비해 이동 가능한 자본의 양을 급속하게 증대시켰다.

 

공장제 수공업의 출현과 함께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길드에서는 직인과 장인 사이에 가부장적 관계가 있었으나, 공장제 수공업에서는 그것 대신에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화폐관계가 나타났다. 이 화폐관계는 비록 농촌이나 소도시에는 아직도 가부장적인 잔재를 남기고 있었으나, 비교적 큰 진짜배기 공장제 수공업 도시에서는 일찍부터 거의 모든 가부장적인 잔재를 씻어 버리고 있었다.

 

상업 및 공장제 수공업의 확장은 이동가능 자본의 축적을 촉진하고 있는데 반하여, 생산을 확대시킬 자극을 받지 못한 길드의 자연적 자본은 정체된 채, 때로는 감소하기조차 했다. 상업 및 공장제 수공업은 犬부르주아를 만들어 냈고, 길드에는 소부르주아들이 모였다. 그런데 소부르주아들은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도시를 지배하지 모했으며, 오히려 대상인들과 공장제 수공업자의 힘 앞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소부르주아-중산계급-대부르주아: 마르크스의 주). 이로써 길드는 공장제 수공업과 접촉함과 동시에 몰락하기 시작했다.

 

자본의 운동이 현저하게 빨라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여전히 비교적 완만한 편이었다. 각기 다른 국민들에 의하여 개척된 각기 다른 부분에서의 세계시장의 분할, 각 국민들 상호 간의 경쟁의 배제, 생산의 미숙성, 이제 갓 초기단계를 벗어나기 시작한 금융제도, 이런 등등 모두가 유통을 심히 저해하였다. 그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값이나 깎는 구두쇠 정신이었고, 이 정신은 모든 상인 및 모든 무역업 경영양식의 속성이었다. 공장제 수공업에 비하면 특히 수공업자에 비한다면야 그들은 분명 대부르주아였지만, 다음 시대에 나타나는 상인이나 산업가에 비하면 그들 역시 소부르주아에 지나지 않았다.

 

4. 가장 확대 된 노동 분업: 대규모 공업

 

17세기 중에 부단히 진전한 영국 한 나라에의 상업 및 공장제 수공업의 집중은, 점차 이 나라와 관련된 하나의 세계시장과 그에 따른 이 나라 공장제 수공업 생산품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 냈는데, 이 수요는 이제 당시의 공업 생산력에 의해서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다. 생산력을 추월해 버린 이 수요야말로 중세 이래의 사유재산제의 제3기를 출현시킨 원동력이었다. 왜냐하면 이 수요가 대규모 공업—공업적 목적을 위한 자연력의 응용, 기계장치 및 최대한으로 확대된 노동 분업—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단계의 여타 전제 조건들, 즉 국내에서의 경쟁의 자유, 이론 역학의 발전(뉴턴에 의하여 완성된 역학은 18세기의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가장 널리 보급된 과학이었다) 등 역시 영국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국내에서의 자유경쟁은 어디에서나 혁명에 의하여 쟁취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국에서는 1640년과 1688년에, 프랑스에서는 1789년에).

이윽고 경쟁은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잃지 않으려는 각국을 강제하며, 자기 나라의 공장제 수공업을 관세정책의 개혁에 의하여 보호하고—지난날의 관세는 이미 대공업에 대해서는 별 쓸모가 없었다—또한 곧 보호관세 하에서 대규모 공업을 도입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보호수단에도 불구하고 대공업은 곧 경쟁을 일반화하여—경쟁은 실제적인 상업 자유였고, 보호관세는 상업의 자유라는 틀 내에서의 하나의 임시방편적인 방어수단의 의미밖에 못 지니게 된다—교통수단 및 근대적 세계시장을 만들어 냈고, 또한 상업을 자기 자신에게 예속시켜 모든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켰으며 그리하여 또한 신속한 유통체계—금융제도의 완성—와 자본의 집중을 만들어 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공업은 모든 곳에 걸쳐 사회계급들 간에 똑같은 관계들을 만들어 내며, 그럼으로써 각 민족의 특성이란 것을 파괴해 버린다. 마지막으로 각국의 부르주아가 여전히 개개 국민의 민족적 이익만을 고집하고 있는 동안에, 대공업은 동일한 이해관계를 지니며, 그들에게 있어 민족성이란 것은 이미 소멸해 버린 지 오래인 하나의 계급을 모든 민족 속에서 만들어 낸다. 이 계급은 낡은 기존의 세계로부터 현실적으로 벗어나 있고, 동시에 그것에 대립하는 계급이다. 노동자들에게 있어 대공업은 노동자의 자본가에 대한 관계만을 참을 수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노동 그 자체까지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분명 대공업은 한 나라의 각 지방에서 똑같은 수준으로 발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운동이 지체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공업이 만들어낸 프롤레타리아들은 이 운동의 선두에 서서 전 대중을 이끌어 가기 때문이며, 또한 대공업으로부터 배제된 노동자들은 대공업 자체의 노동자들보다도 더욱 열악한 생활 상태로 바로 그 대공업에 의해서 몰아붙여지기 때문이다. 위와 비슷한 방식으로, 대공업이 발달한 나라들이 다소 미발달한 나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데, 단 이것은 미공업화된 나라들이 세계교류를 통해 전반적인 경쟁전으로 빨려 들어가는 한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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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여러 가지 생산형태는 곧 그에 조응하는 여러 가지 노동조직형태이며, 따라서 여러 가지 소유형태이다. 어떤 시대에 있어서나 실제로 존재하는 여러 생산력들의 결합은—욕구에 의해 필요로 되는 한—발생하고야 만다.

 

5. 혁명의 진정한 토대: 생산력과 교류형태 간의 모순

 

앞서 본 바와 같이 과거 역사에 있어 몇 번이나 나타나는—하지만 그 기초를 위태롭게는 하지 않으면서—생산력들과 교류형태들 간의 모순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반드시 하나의 혁명으로 폭발한다. 이 혁명은 또한 모든 것들을 끌어 들이는 충돌 즉, 여러 계급들 간의 충돌, 의식의 모순에 기인하는 사상투쟁, 정치투쟁 등 여러 가지 부차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좁은 시각에서 보면 이들 여러 가지 부차적 형태들 중의 하나를 떼어 낸 다음, 그것이야말로 이들 혁명의 토대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기가 쉬워진 것은 혁명을 일으키는 개개의 사람들 자신이, 그들의 문화수준 및 역사의 발전 단계에 따라 그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환상을 그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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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우리 견해에 따르면 역사상의 모든 충돌은 모든 생산력과 교류형태 간의 모순 속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덧붙인다면, 이 모순이 한 나라에 있어 충돌하기에 이르기 위하여, 반드시 그 특정한 나라에서만 그 모순이 극한적 상황에까지 치달을 필요는 없다. 국제적 교류의 확장으로 인하여, 산업적으로 더욱 발달한 나라들끼리의 경쟁은 그와 같은 모순을 보다 덜 발달한 산업을 가진 나라들 내에서도 만들어 낸다(예컨대, 독일의 잠재적 프롤레타리아는 영국 산업의 경쟁에 의하여 두드러진 모습을 띠게 되었다).

 

6.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공동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체로서 공산주의

 

한 계급의 개개인들이 참여하는 공동의 관계, 제3의 분파의 이해와 대립되는 그들의 공동이익에 의해 결정되는 공동의 관계라는 것은, 이들 개개인들이 자기 계급의 존재조건 내에서 생활하는 한에서, 단지 평균적인 개인으로서만 참여하게 되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다시 말해서 개개인들이 하나의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 계급의 구성원으로서밖에 참여할 수 없는 하나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즉, 자신들의 생활조건 및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생활조건을 자신의 통제 하에 접수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공동체는 그와 정반대이다. 각 사람들은 그 공동체에 개인으로서 참여한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는 개인들 간의 결합(물론 근대 생산력의 진보를 전제로 해야 한다) 즉,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 및 운동의 조건을 자기통제 하에 두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 및 운동의 조건은 예전에는 우연에 맡겨져 있었으며, 또한 각 사람들에 대립하는 독립된 존재로서 군림하였다. 왜냐하면 노동의 분업으로 인해 결정된, 각 사람들 간의 분화의 결과, 그들 간의 어쩔 수 없는 결합은 각 개인들에게 있어 소외된 외적인 유대로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결합은(결코 예컨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서술된 바와 같은,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결합이 아니고 피할 도리가 없는 필연적인 결합) 단지 위 조건들에 조응하는 것들이었을 뿐이며, 그 결합 내에서 각 사람들은 단지 운명의 장난만을 자유로이 즐길 수 있었다(예를 들어 북아메리카 국가의 형성과 남아메리카 공화국의 형성을 비교해 보라). 지금까지 사람들은 운명과 우연을 즐기는 일을 방해받지 않을 이러한 권리를 인간의 자유라고 불러왔다. 말할 것도 없이 이들 생활의 조건이란 단지 그 특정 시기에 있어서의 생산력과 교류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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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가 이전까지의 모든 운동과 구별되는 점은, 이전의 모든 생산관계와 교류관계의 토대를 뒤집어엎고, 모든 자연발생적 전제 조건들을 지금껏 존재해온 인간들의 창조물로서 처음으로 의식적으로 간주하며, 그것들로부터 그 자연적 성격을 벗겨내 버리고 다시 그것들을 단결한 개개인들의 힘 아래 복속시킨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 제도는 경제적이며, 단결된 연합체의 여러 조건들을 물질적으로 생산해 내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현행 조건들을 연합체의 조건들로 바꾸어 놓는다. 공산주의가 만들어 내는 현실은, 현실이 곧 개개인들의 이전까지의 교류의 산물인 한에 있어서는, 각 사람들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게 하는 참된 토대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실질적으로, 지금까지의 생산 및 교류에 의해 만들어진 조건들은 비유기적인 조건들이었다고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그 재료들을 마련해 주는 일이 이전 세대의 계획 또는 운명이라고 하는 환상을 품지는 않으며, 또한 이들 조건들이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유기적인 것이었다고 믿지도 않는다.

 

7. 생산력 발전과 교류형태의 변화

 

교류형태에 대한 생산력의 관계란 곧 사람들의 직업 또는 활동에 대한 교류형태의 관계이다. 이 활동의 기본 형태는 물론 물질적이며, 다른 모든 정신적, 정치적, 종교적 활동 등은 이것에 의해 좌우된다.

 

처음에는 자기활동의 조건들로서 나타나고, 나중에는 자기활동에 대한 질곡으로서 나타나는 이들 여러 조건들은, 역사의 전 발전과정에 있어서 일관된 일련의 교류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것의 일관성이란 다음과 같다. 즉, 이제 하나의 질곡이 되어 버린 예전의 교류형태는 새로운 것 즉, 보다 발전한 생산력과 그에 따른 개인의 더욱 진전된 자기활동에 조응하는 새로운 교류형태로 대체된다. 하지만 이 형태 역시 다음에는 다시 하나의 질곡으로 되어 버리고, 또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이들 조건들은 각 단계의 생산력의 동시적 발전에 조응하는 까닭에, 이들 조건의 역사는 곧 부단히 발전하면서 새로운 각 세대에게 물려지는 생산력의 역사이기도 하며, 따라서 사람들 자신의 힘의 발전사이기도 하다.

 

이 발전이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즉 자유로이 결합한 각 개인의 총 계획에 의거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에, 그것은 여러 지역, 여러 부족, 여러 민족, 여러 노동 부문 등으로부터 진행된다. 이것들은 처음에는 서로가 관계없이 각기 발전하고, 나중에야 점차 결합된다. 게다가 이 발전은 극히 완만하게 밖에 진행되지 않는다. 갖가지 단계 및 이해관계는 결코 안전하게는 극복되지 못하며 단지 우세한 이해관계에 굴복한 채, 그와 병행하여 그 후로도 수 세기에 걸쳐 존속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한 국가 내에서조차—그들의 재산 상태는 제쳐놓는다 하더라도—개개인들은 극히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발전한다는 것, 그리고 후대의 이해관계에 속하는 교류형태에 의하여 이미 배척되고 나서도, 전 세대의 이해관계, 전 세대의 특정 교류형태는 오래 동안 독립적인 환상적 공동체(국가, 법)를 통하여 사람들에 대하여 전통적인 힘을 계속 발휘한다는 것, 그리고 이 힘은 궁극에 있어 오로지 혁명에 의해서만 분쇄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8. 노동과 자본 간의 모순

 

대규모 공업 및 경쟁 속에서 사람들의 전반적인 존재조건, 제한성, 일면성은 두 가지의 가장 단순한 형태 즉, 사유재산제와 노동으로 귀결된다. 화폐의 출현과 함께 모든 교류형태, 그리고 교류 그 자체는 사람들에게 있어 우연적인 것으로 부각된다. 이렇듯 이미 화폐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교류는 오직 규정된 조건들 하에 있는 개인들 간의 교류였을 뿐이지, 개인들로서의 개인들 간의 교류는 아니었다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이들 조건들은 두 가지로 다시 말해서, 축적된 노동 또는 사유재산과, 현실적인 노동이하는 것으로 환원된다. 만약 이 두 가지 다, 혹은 그중 하나가 중지되면 교류는 중지된다.

…사유재산제란, 그것이 노동 내에서 그 노동에 대립하는 것인 한, 축적의 필연성으로부터 발생되어 나오는 것이다. 또한 사유재산제란 처음에는 주로 공동체적인 형태를 취했지만, 그 후 발전하는 과정에서 차츰 근대적인 사유재산제의 형태로 접근하게 된다.

노동 분업은 애초부터 이미 노동조건들의 분열 즉, 도구와 재료 간의 분리 및 그에 따른 서로 다른 소유자에게로의 축적 자본의 분리를, 따라서 또한 자본과 노동 간의 분열 및 갖가지 서로 다른 소유형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 분업이 한층 발전함에 따라, 또한 축적이 진행되고 증대됨에 따라, 이러한 분열 역시 더욱 첨예하게 된다. 노동이라는 것은 오직 이 분열을 전제로 해야만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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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이 밝혀진다. 첫째로 생산력은 각 개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고 그들로부터 분리된 채, 그 사람들과 병존하는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로서 나타난다. 이렇게 되는 까닭은, 생산력을 이루는 각 개인들과 그 사람들의 힘은 분산되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서로 대립하는 반면에, 이러한 생산력은 이 각 개인들 간의 교류와 결합에 있어 유일한 현실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한편, 우리는 사실상 물질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고, 개개인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 개인의 힘이 아닌 사유재산의 힘으로서 나타나며, 따라서 그 개인이 그 사유재산의 소유자인 경우에 한에서만 그 개인의 힘으로써 나타나는 ‘총체적인 생산력’만을 갖는다.

 

노동 즉, 그들의 생산력 및 그들 자신의 존재와 연결시켜 주는 유일한 연결고리는 이제 자기활동이라고 하는 일체의 외양을 잃어버린 채, 다만 그 각 사람들의 생활을 위축시키는 것에 의해서만 그 개인들의 생활을 유지시켜 준다. 이전 시대에는 자기실현과 물질적 생활의 생산이 각기 다른 인간에게 맡겨졌었고, 또한 개인들 자신의 우매함으로 인하여 물질적 생활의 생산이 아직 자기실현에 종속적인 양식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분리되어 있었음에 비하여, 이제는 양자가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나뉘어져, 물질적인 생활이 목적으로 되어 버리고, 이 물질적 생활의 생산 활동 즉 노동(이는 이제 유일하게 가능한 자기활동 형태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듯이 부정적인 자기활동 형태이다)은 수단으로 되어 버렸다.

 

9.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유재산제 폐지의 필연성

 

이리하여 이제 사람들은 단지 스스로의 자기실현을 확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들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서조차도 현행 생산력들의 총체를 자기 것으로 점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 점취란 우선 첫째로 점취되어지는 대상—즉, 하나의 총체로까지 발전하여, 오로지 세계적인 교류 속에서만 존재하는 생산력들—에 의하여 규정된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이 점취는 이미 그 생산력과 교류에 조응하는 세계적인 성격을 띠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 생산력의 점취란 곧 그 물질적 생산용구에 조응하여 각 사람들의 여러 능력들이 발전함을 뜻한다. 이런 까닭에 생산용구들 총체의 점취란 곧 사람들 스스로의 총체적인 여러 능력들의 발전을 뜻한다.

이 점취는 다시 점취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규정된다. 오로지 현대의 프롤레타리아 즉, 일체의 자기활동을 완전히 박탈당한 그만이 완전한, 더 이상 제한되지 않는 자기활동 즉, 생산력 총체의 점취 및 그에 수반한 여러 능력들의 총체적 발전인 자기활동을 실현시킬 수 있다.

예전의 모든 혁명적 점취는 제한된 것이었다. 즉 미숙한 생산용구와 제한된 교류에 의하여 자기활동이 제한되어 있던 개개인들이 이 미숙한 생산용구를 자기 것으로 점취한 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생산용구는 그들의 소유로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노동 분업 및 그 생산용구 아래 굴복된 채로 있었을 뿐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점취에 있어서는 대량의 개개인들이 단지 하나뿐인 생산용구 아애에 굴복하였다. 이에 비해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점취는 대량의 생산용구들이 각 개인들에게 예속되어야만 하며, 재산이 모든 이에게 예속되어야 한다. 근대의 세계적인 교류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한, 결코 각 개인들에 의해서 통제될 수 없다.

이 점취는 다시 그 일이 완성되어야 할 양태와 방식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즉 점취란 오직 단결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으며, 이 단결은 프롤레타리아 그 자체의 성격으로 인하여 다시 하나의 범세계적인 단결일 수밖에 없으려니와 이것은 혁명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이 혁명을 통해서 이전의 생산 및 교류양식과 사회제도의 힘이 뒤집어엎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점취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프롤레타리아의 범세계적 성격 및 에너지가 그와 함께 발전하고, 나아가 프롤레타리아는 이전의 사회적 지위로 인해 자신에게 남아 있던 일체의 잔재들을 그 혁명을 통해서 벗어 버린다.

이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자기실현이라는 것은 물질적 생활과 합치되게 된다. 이는 곧 개개인들의 완전한 개인으로의 발전 및 일체의 자연적 한계의 탈피를 의미한다. 노동의 자기활동으로의 변화란 곧 예전의 제한된 교류가 개인으로서의 개개인들 간의 교류로 변화됨을 뜻한다. 단결된 개인들에 의한 생산력 전체의 점유와 함께 사유재산제는 종말을 고한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는 항상 하나의 특수한 생활의 지위가 우연적으로 보인데 비해, 이제는 오히려 개개인들 간의 고립 및 각 사람마다의 특수한 생계방식이야말로 우연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이제 더 이상 노동 분업에 예속되지 않는 이 개인들을, 철학자들은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이상으로서 생각해 왔으며, 또한 그들은 우리가 보여준 위의 전체과정을 ‘인간’의 발전 과정으로 간주해왔다. 이리하여 역사의 모든 단계마다 당시 존재하던 개개인들 대신에 ‘인간’이란 것이 들어앉고 마치 이 ‘인간’이 곧 역사의 원동력인 양 내세워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 모든 역사과정은 ‘인간’의 자기소외 과정으로서 이해하게 되었는데(자기소외-마르크스의 주), 이것은 본질적으로 뒷시대의 평균적 개인을 슬그머니 앞 시대에 앉혀 놓음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애당초 현실적인 조건들을 무시해 버리는 이 전도된 행위를 통해서 모든 역사가 의식의 발전과정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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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란 어떤 특정한 생산력 발전단계에 있는 개개인들 간의 모든 물질적 교류를 포함한 뜻의 말이다. 그것은 그 어떤 주어진 단계의 모든 상업적 생활과 산업적 생활을 포함하는 것이며, 또한 비록 그 시민사회가 대외적으로는 자신을 민족으로서 주장하고 대내적으로는 자신을 국가로서 조직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는 것이다. ‘시민사회’란 용어는 소유관계가 이미 고대적, 봉건적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18세기에 등장하였다. 이런 의미에서의 시민사회는 오직 부르주아와 함께 발전하였다. 하지만 생산과 교류로부터 직접 전개된 사회조직 즉, 모든 시대에 있어서 국가 및 기타 관념상의 상부구조의 토대를 이루고 있던 사회조직은 늘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려왔다.

 

10. 국가와 법의 소유에 대한 관계

 

이 근대적인 사유재산제에는 근대국가가 조응한다. 사유재산 소유자들은 조세라는 수단을 통해 점차 근대국가를 매입해 버리고, 국채제도를 통해서 완전히 그들의 손아귀에 장악해 버린다. 그리하여 이 근대국가의 생사는 재산소유자 즉, 부르주아가 베푸는 상업적 신용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며 정부의 안위는 증권거래소의 시세를 반영하여 오르락내리락하게 된다.

이미 하나의 ‘계급’일지언정 하나의 ‘신분’은 아닌 까닭에, 부르주아는 자신을 더 이상 지바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국민적으로 조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자신의 일상적인 이해관계에다가 하나의 일반적인 형태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동체로부터 사적소유를 해방시킴으로써 국가는 이제 시민사회의 외부에 병존하는 하나의 고립된 몸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대내적 그리고 대외적 목적을 위해서도 또한 그들의 이익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국가라는 조직형태를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란 지배계급에 속하는 개개인들이 그들의 공동이익을 그 속에서 관철하는 형태이고, 한 시대의 시민사회 전체가 그 속에서 총괄되는 그러한 형태인 까닭에 무릇 모든 공동적 제도는 국가를 매개로 하게 되며, 또한 하나의 정치적 형태를 보유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런 까닭에 마치 법률이 의지에, 더욱이 저 현실적 토대로부터 유리된 의지,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환상이 생기며,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정의는 법령으로 환원된다.

 

단대의 소유관계들은 민법 속에서는 일반의지의 산물이라고 주창된다. 사용권 및 처분권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사유재산제가 완전히 공동체로부터 독립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사유재산제가 오직 사사로운 의지에 즉, 물건에 대한 자의적인 처분에만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한 환상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Posted by 조반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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